
ⓒ 쇼이스트/CJ창업투자/에그필름 외
[올드보이]에는 좋은 부분들이 무척 많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오대수가 사회에 나와 처음 만난 남자와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부분이다. 오대수는 자살을 하려던 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것들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을 깊이 공감하며 듣던 남자는 오대수의 말이 끝나자,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대수는 그를 외면하고, 그는 떨어진다. 내가 이 상황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의 소통들의 단면(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식스센스]에서의 유령처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이란 (그 오랜 기간을 갇혀지내면서 자신이 타인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노트 일곱 권을 작성할 정도로) 많은 성찰을 한다해도 역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친구 하나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자가 죄인이다. 왜냐하면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유예 상태에 있었던 모든 원한과 모든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 알베르 까뮈, [시지프의 신화] 중에서
같은 행동을 여전히 반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게다가 그 깊고 깊은 상처들이, 오대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일어난 일들이라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의도와 상관없이, 흡사 해충처럼 항상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아닐까!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조금의 비약이 있음을 인정한다.) 만약 정말 내 삶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만 하는 것이라면, 내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면 과연 나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복수극이라는 견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올드보이]는 복수보다는 자살에 대한 영화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다룬 영화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세 명 나온다. 우진, 우진의 누나, 그리고 옥상위의 남자. 그들은 왜 죽었던 것일까? 순간의 격정에 흔들린 탓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자살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어떤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다. 까뮈가 말했듯 '가치'는 사람을 살게하거나, 죽게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개념이다. 옥상 위의 남자가 삶은 고통일 뿐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면, 우진 남매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누나는 동생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목숨을 끊었고, 우진 역시 그 날에 자신의 인생이 멈춰버렸다. 우진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만 했던(영화가 시작되던 시점에서 실제로는 우진은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삶이 정지해버렸으니. 그것은 아무 생각없었던 대수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이유는 자신들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그것이 어떤 의미였고 고통이었는지에 대해 대수에게 알려주는 것 뿐이었다. 그 목표가 사라진 이상 우진은 생물학적으로도 더 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진은 대수에게 똑같은 상황에 놓이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한다. 누나는 죽었고, 미도는 살아있다. 당연히 대수는 죽을 수 없다. 참으로 관대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이미 죽어버린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미화할 수도,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저 살 가치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 - 오대수로 대표되는 - 이다.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 대수는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어 최면술사에게 편지를 쓴다. 한 남자를 감금하고, 근친상간을 하도록 만든 그 최면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도의적으로는 도와줄 필요가 없지만, 편지의 마지막 한 줄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아갈 권리는 있는 것이 아니냐던 그 한 줄. 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남자에게 들었던, 그 말이다. 대수는 그에게 죽음을 선사했지만, 그는 대수에게 삶을 선사했다. 지독한 아이러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도없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 삶의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비단 복수해봐야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당연한 이야기와 더불어 나는 이것이 [올드보이]의 결론이라 생각한다. 살면서 수도 없이 타인을 해하는 티끌만큼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영화에서 근친의 설정을 굳이 가져왔던 것은 흥행을 위해서도, 자극적인 무엇을 즐기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함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이 사회에서 망가진 '도덕성'을 대표할 수 있는 무엇(그러니까 사실과는 무관하게 감정적으로 짐승과 비슷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무엇)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몬스터가 남아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되기는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천만에, 인간은 원래 몬스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박찬욱은 살아가야 한다는 엔딩을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도덕적이지 못해도 괜찮아', '짐승만 못해도 괜찮아'. 삶은 모든 것을 우선한다. 삶의 가치라는 것은, 삶 그 자체에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목적을 그토록 찾아 헤맸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존재'가 '존재의 목적'을 우선하니 살아가라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결국 [올드보이]를 다른 화법으로 풀어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요. 울어라, 너만 울 것이다."라는 말은 공연히 자학하지 말고 잘 살아가라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2007. 5. Argento.
예촌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볼 수 있다. 고로 나는 인정한다."
멋진 말씀. ^^
명포스트.
비공개 글은 이사할 때 가져올 수 없다네요. 그래서 재활용삼아 다시금 올려보았습니다. ^^
분명 봤는데도 희한하게 그 이미지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ㅠㅠ
다시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올드보이]까지 박찬욱의 영화는 참 좋았어요. 실은 제 취향에 맞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어딘가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어도 전 이 영화가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