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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일반영화 2010/03/08 11:12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청년을 찾아갔다가, 그의 입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의 아내는 한 때의 관계일 뿐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건 당신의 딸이에요." 아마도 나라면 그 순간 바로 그를 반쯤은 죽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패륜 로맨스영화 [졸업]의 한 대사다. 얼마나 극악한가! 하지만 이런 극악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졸업]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 마이크 니콜스는 이 당시에도 능구렁이였다고 생각한다. [졸업]을 처음 감상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상당히 즐거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면서 이 영화는 그리 행복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벤자민은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레일(졸업 후 대학원, 혹은 다른 진로)이 아닌 다른 일(different)을 하고 싶어하지만,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일을 찾는 잠깐의 일탈과정에서, 옳지 않은 향락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 사이의 권력구도의 변화였는데, 첫 관계시 갓 졸업했을 뿐인 모범소년은 어떤 의미에서도 부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의 모습은 흡사 고양이 앞의 쥐 같아 보인다. 그러나 관계가 거듭되면서 서서히 그들은 그러한 권력구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벤자민은 그들의 관계로부터 어떤 허무를 느낀다. 그들의 관계는 졸업 후 진로를 찾지 못한 벤자민의 상태에 대한 일종의 반복으로, 그가 기성세대와의 동거(혹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진로상의 어떤 절차)에 질식해가고 있는 청년임을 의미한다. 그 때 동년배인 일레인이 로빈슨 부인이 줄 수 없는 것을 가진 어떤 이로 등장한다. 그러니 그녀는 'different'였던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 부인은 결코 일레인과 벤자민이 맺어지게 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벤자민과 일레인의 관계는 로빈슨 부인을 빼놓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벤자민이 일레인을 택하는 행위에는 지고지순한 일레인에 대한 사랑만 존재하는게 아니다. 거기에는 로빈슨 부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심 하에서 바라보면 일레인에 대한 벤자민의 사랑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벤자민이 일레인을 정말 사랑했는지조차도 확신이 잘 가지 않는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그들의 연애 속도에 공감하지 못하는거야 러닝타임이 무한정 길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쳐도, 스토킹에 가까운 벤자민의 태도는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들게 한다. 그는 단지 결혼이라는 새로운 목표(different)에 골인하고자 하는 한 사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게 결혼이란 원하는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러나 둘 간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결혼은 더 이상 아버지나 그의 친구들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사실 기성세대(로빈슨 부부로 대변되는)가 극렬히 반대하는 어떤 것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졸업]의 마지막 장면(신부 탈취씬이 아니라 버스씬을 의미한다)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벤자민은 결혼을 통해 기성세대에게 한 방 먹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승리가 그들에게 행복을 허락할 것인가? 글쎄, 모르겠다.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갈망하던 서로를 얻었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어딘가 불길한 구석이 있다. 그들의 얼굴을 보라. 짧고 환한 승리의 감정이 가라앉고 난 후, 그들은 말을 잃는다. 이 때 배경음악으로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가 흘러나온다, 이 얼마나 판타스틱한 선곡인가! 그 뿐이랴? 서로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한다. 일레인은 벤자민에게 고개를 돌리지만, 그의 굳은 옆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대신 그들을 향하는 것은 수많은 노인들의 이상한 시선이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간간히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는 둘의 희미한 미소에는 스스로를 위안할 힘조차 없어 보인다. [졸업]은 막연히 다른걸 하고 싶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을 졸업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알 길 없는 미래(그럼에도 버스는 달려간다)에 불안해하는 두 젊은이의 모습을 비춰주며 끝나는 영화다. 바뀐건 없다. 그나마 이젠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게, 희망이라면 희망일게다.


2010. 3. Argento.


The Graduate, Mike Nichols, U.S.A, 1967


. [졸업]에서 사용된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만큼이나 이 곡이 영화 속에서 적절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장면은, [왓치맨]의 묘지씬이다. 죽은 자만큼이나 조용히 말하는 자가 또 어디 있으랴. 일전 [새벽의 저주]의 한 장면에서 '돈 워리 비 해피'라는 곡을 들었을 때만큼 즐거움이 있었다. 나는 잭 스나이더가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얼마나 드러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상의 스타일은 인정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매우 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가 만든 작품의 정수에 드러나는 개념들을 그는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왓치맨]이 이렇게 멋진 영화로 나올거라고 생각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