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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7 영화잡담(2.17) (20)
1. 2000년은 한국공포영화에서 슬래셔는 먹히지 않는다라는 다소 섣부른 믿음을 만들어낸 한 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 상업 공포영화의 전통에 기댄 일련의 네 작품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참패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슬래셔가 안 먹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관객의 눈이 [스크림]의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라는 것이 더 큰 이유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리퍼러를 보다보니 오늘 따라 유독 2000년 한국공포영화라는 키워드를 치고 이 곳을 방문하신 이가 많았다. 그래서 케이블에서 2000년 한국공포영화를 틀어주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화들은 최근 본 두 작품을 제외하고서는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시간이 맞으면 한 편 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리퍼러들이 달린 이유는 다소 의외였다.
2000년에 공포영화를 찍은 모감독이 미성년자 성폭행 미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나. 조금 씁쓸하더라. 그게 누군지 내 입으로는 말 못해주겠다. 하지만 2000년 공포라고 분류할 수도 있을만한 한국영화들은 [가위], [찍히면 죽는다], [하피], [공포택시], [신혼여행], [해변으로 가다],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 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진혼곡], [파라다이스빌라], [아티스트] 등이 있었으니, 이제 슬슬 인터넷의 항해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아, 이런. 이미 끝냈겠구나.

2. 오늘 [마녀의 관]이라는 영화 개봉에 대한 메일을 받았다. 2008년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인 바 있다는 이 작품은, [기담]의 원작자 박진성 감독의 옴니버스물로 고골의 유명한 [Viy]를 한국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라고 한다. 제법 모양새가 괜찮을 것 같다는 기대가 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슬퍼진다. 사실 나는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영화제를 잘 가지 못했고, 검색도 그닥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하루에도 한 두 번씩은 들르던 해외 공포 웹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은 이제 주간, 혹은 월례행사가 되어가고 있다.
대신, 나는 [나홀로 거실 영화제]를 자주 하는 편이다. 나홀로 거실 영화제는 장점이 꽤 있다. 일단 내가 영화를 선정할 수 있다는 것. 술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이런 감독전 한 번 하면 어떨까요라고 말해봐야, 이러저러한 이유로 씨도 안 먹혔던 작품들을 원없이 볼 수 있다. DVD로 나 혼자 봐야한다는건 슬프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장점이다.
어쨌거나 2월만 예를 들어도 [판의 미로] 블루레이 출시를 기념한 기예르모 델 토로 호러필름 영화제를, [뉴욕 리퍼] 블루레이가 날아오는 시간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루치오 풀치 지알로 필름 영화제를 했다. 처음에 나홀로 영화제를 기획하는 동안에는, 이번 기회에 이 감독들에 대해 뭔가 글을 남기고 말리라라는 굳은 결심을 한다. 하지만 정신 놓고 영화를 보다보면 글 쓸 시간에 한 편 더 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다가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머리 속에 헝클어지게 되고, 종국에는 나중에 한 번 더 보고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다보면 정말 쓰고 싶은 글들을 오히려 더 못 쓴다. 웃기는 얘기다. 죽기전에는 쓰겠지라고 생각한다.

3. 이번 설연휴에는 해야할 거창한 일이 있었으나, 의외로 빨리 끝났다. 그래서 연휴 내내 영화를 봤다. 어쩐지 원기를 회복한 느낌이다. TV로 본 영화도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일부만 봤고, [국가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예전에는 영화 중간에 들어가는 광고 때문에 TV 영화 보기를 꺼렸는데, 쉬는 시간 동안 담배를 필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TV를 이리저리 돌리다보니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하고 있더라. 대니 보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DVD가 출시되자마자 사서, 집에 오자마자 감상했던 작품이다. 내게 사온 날 바로 재생하는 경우란, 5% 미만에 그치는 흔치 않은 경우다. 보통 영화를 보지 못할 때 많이 사기도 하는데다가, 보통 감상한 적이 있는 영화를 사오기에 재생이 한참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니 보일의 영화니까, 바로 재생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슬럼독]은 정말 밍숭맹숭한 영화였다. 솔직히 대니 보일의 필모 중에서도 떨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10년이 더 지난 영화들1이 [슬럼독]보다 기억이 훨씬 선명하다. 너무나 걸작을 리메이크했던 고로 숙명적으로 욕을 들어먹어야 했던 [비치]나, 귀여운 [밀리언즈], 로메로 좀비물을 현대의 감성으로 되살린 [28일후]도 역시 [슬럼독]보다는 낫다. 나는 어째서 이 작품이 그토록 과대평가받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운명적 사랑을 다루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도를 차용했기 때문인가.
SBS가 동계올림픽의 분위기를 고양시키고자 편성했던 (것이 분명한) [국가대표]도 별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쿨러닝]으로 대변될 수 있는 장르영화의 골격(두 영화는 정말이지 굉장히, 때로 노골적으로 비슷하다)에서 벗어나는 부분(쿨러닝과 차별성을 가지는 부분)들이 모조리 덜컹거리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에서 가장 중요했을 것이 분명한, 비인기 종목을 향한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이 소거되버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성적으로는 이 영화가 별로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눈물을 흘려버린 내 자신이 맘에 안들어서 불쾌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김용화 감독은 감정을 만들어내는 포인트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2010. 2. Argento.



  1.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쉘로우 그레이브]나 일종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던 [트레인스포팅]과 같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