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엑소시즘 공포영화

이런 종류의 영화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기계적으로 [블레어 윗치]와 비교하고는 한다. 사실 그런 비교는 정말 지겹지만서도. 어쨌거나 이 작품은 [블레어 위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가 늘상 그렇듯 현실처럼 느끼게 하여 공포에 공감시키려기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 그리고 관습적 소재들에 대해 이리저리 틀어놓으면서 재미를 자아내는 편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페이크 다큐를 자청하는 영화치고는 서사가 꽤나 탄탄하다. 러닝타임이 진행될수록 급변하는 캐릭터와 이야기도 적잖이 인상적이고. 


그 서사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위커맨]을 떠올리게 한다. 생업을 위해 떠났던, 굳건하지 못한 신앙을 가진 목사(물론 [위커맨]의 경사는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를 보이지만)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공간에서(관객들도 몇 차례 배반을 당하게 된다), 이교도들의 농간에 휘둘리게 되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신앙을 검증할 기회까지 가지게 된다. 즉, 엑소시즘이란 악마를 쫓아내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뒤에 무엇이 기다지고 있을지라도. 이런 해석은 [엑소시스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상당히 똑똑하게 적용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엑소시즘을 일종의 심리치료 및 상황극(엑소시즘의 현대적 해석이다. 그는 엑소시스트라기보다는 마술사 혹은 배우에 가깝다. 현실에서 한 개인이 악마에 씌울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으로 탈바꿈하여 재미를 주는 것은 일종의 보너스. 물론 모양새가 말쑥하게 빠지지는 않았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영화다. 


Last Exorcism, Daniel Stamm, U.S.A./France, 2010.


덧 1. 이 영화의 전문가 평점은 두 개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먼저 '엑소시즘계의 [블레어 윗치]가 되기엔 스킬이 부족하다'는 장영엽의 말.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말쑥하지는 못하다. 초반부의 촬영은 정말 아마추어의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영화 정말 지겹다 지겨워'라는 김종철의 말은 아무래도 박한 구석이 있다. 물론 위의 20자평들은 올여름(아차, 작년 여름이구나) [폐가]를 보고나서 내 입으로 뱉은 말들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역시 누군가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덧 2. 신의 존재를 믿으면 악마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물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옳지 않을지언정 사이비 신자들의 신앙이, 사이비가 아닌 신자들의 신앙보다 훨씬 강할 것 같아보였다. 잃을게 없는 이들은 극단적이고 치밀해질 수 밖에 없는 법이거든. 

서영희 그외

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책에서도 한 문장으로), 사실 나는 서영희가 호러 장르에서 빛을 발할거라고 예상한 바 있었다. 그래서 [스승의 은혜] 당시 그녀를 많이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시큰둥. (여기에 대해서도 밝힐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뭐, 내가 찍으면 다 틀린다라고 체념하고 말았다. 당시 어떤 이가 당신은 왜 서영희가 핏빛영화에서 통할거라고 생각하느냐라며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다소 조심스럽게 (너무 변태적 가학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까봐. 뭐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 (지나간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


"서영희가 생긴 모습이 뭐랄까 왠지 좀 괴롭히고 싶은 페이스 아니냐, 게다가 눈망울 봐라. 괴롭히면 반응도 제대로 올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어딘가 작고 단단해 보이는 것이 그냥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한 번 쯤은 일을 낼 것 같다."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감상했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이미지였다. 정말 이런 기분 오랫만이다. 그녀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영화에 대해서도 나름 밟히는 구석이 있어 조금은 긴 글을 적어보려고 했는데, 방관자의 태도나 각성 등에 대한 진부한 얘기 빼고나니 딱히 덧 붙일 말이 없어 일단 보류. 올해 내가 본 핏빛 가득한 영화 중에서는 가장 괜찮았다는 정도만 덧붙여 놓자. 장르팬으로서 낫을 좀 더 멋지게 활용하지 못한게 아쉽기는 했지만, 이건 뭐 정통호러물은 아니니까.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못한 아이들 - 헨젤과 그레텔 공포영화

[남극일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현실을 잊기 위해, 계속해서 도망쳐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둔 아이를 지울 수 있는 아버지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멀리 간들 아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저 먼 곳, 남극까지 유령이 쫓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가 목표로 하는 곳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찾아 떠난 곳은 도달불가능점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꽤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임필성의 영화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때, 더욱 재미있는 구석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번 적어본다. 먼저 이하의 내용은 순전한 개인의 억측임을 밝혀둔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음을 역시 밝혀둔다.

정치적 맥락에서 다시 요약하면, [남극일기]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원들을 모두 죽음에 빠뜨리는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성장이라는 지상목표를 추구하느라, 정작 국민들의 삶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 결과 때로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독재자로 해석하면 딱 떨어진다. 그러니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르던 대장에게 반발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재자에 대항해 일어난 민주화 세대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말미의 한 대사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겼다. "너는 나를 말렸었야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이 대사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독재자의 떳떳치 못한 말로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화 세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우고 있는 듯한 의심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 느낌의 실체가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바는 또 무엇이었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영화가 차기작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하다. [헨젤과 그레텔]의 아버지(고아원의 원장) 역시, [남극일기]의 아버지(탐험대의 대장)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후에 대장과 싸움을 벌였던 유지태처럼, 원장에게 학대당하던 고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역시 그를 죽인 고아들은 민주화 세대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고아들의 실제 출생년도가 60년대라는 점이었다. 간단히 그들은 386세대로 한정지을 수 있는 연령대이다. (비록 오빠는 58년생이었지만 그가 대학생이었다면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것이니, 넓게는 그러한 세대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아들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이상향의 모습을 알아냈다.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어야 해." (당연하게도 영화 속에서 그 책은 제목처럼 [헨젤과 그레텔]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주화를 이끌어낸 책은 무엇이었을까.) 고아들은 그 깨달음대로 원장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를 만들었다. 즉, 그들은 민주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부모를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입맛에 맞는 부모를 원하지만,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모를 교체하거나, 혹은 공포를 통해 좋은 부모로 만들고자 한다. 부모를 맞는 순간부터, 부모를 유지하는 그 순간들 모두에 폭력이 깊숙이 개입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들이 만든 세계란 현실과는 달랐다. 그들은 머무른 세계는 그저 동화 속일 뿐이었다. 동화 속 세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한 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서 그저 승리에 탐닉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부모를 닮아가고 있었다. 공포와 폭력. 은수(천정명 분)는 호소한다. "그러면 니들이 뭐가 달라." 
고아들은 자신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만 착한 의도가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경우가 그리 드물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좋은거야."라며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소년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맞는 얘기라도 그것이 도그마가 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해질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헨젤과 그레텔]은 그들이 동화가 아닌 현실로, 다시 한 번 나오기를 촉구하는 영화다. 고아들보다 실제로 아래 세대인 은수는 진심을 통해 그들과 소통한다. 그 결과 고아들은 현실의 은수를 몰래 방문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아직 현실로 나와 좋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세상이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희망적인 엔딩이라 할 수 있겠다. 변화에 대한 기대만 존재해도,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 임필성, 한국, 2007.


덧 1. [헨젤과 그레텔]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심은경이 연기한 영희였다. 사실 고아들이 꽤 나이가 많을 것이라는 점은 영화를 처음 볼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는데, 영희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잘 아는 듯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은경은 그저 순수하고 나약한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하지만 성적인 기운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하자니 불경한 기분도 든다만) 그래서 부모에게 성적 학대가 있었을거라는 생각도 품었었다. 실제로도 그런 캐릭터라 상당히 뿌듯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앞으로 어떻게 커갈지 잘 모르겠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배우다.

덧 2. 임필성 감독은 명확한 얘기를 너무 얌전하고 친절하게 한다는 느낌이 든다. 분노에 떠는 소년이 어머니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그림을 그렸을 때, 당연히 [캐리]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는 전개라니, 그렇게 점잖은건 곤란하다. 게다가 눈치를 이미 다 챌 정도로 힌트를 흘려놓고, 몇 번씩 설명하는 것 같아보였다. 아마 그는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듯 하다. 솔직히 나는 그가 단호하게 말하고, 주저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분명 [남극일기]도 [헨젤과 그레텔]도 좋은 영화지만, 그는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DVD] Mumsy, Nanny, Sonny and Girly 컬렉션

영국 감독 프레디 프랜시스의 호러코미디 작품. 프레디 프랜시스는 "내가 공포영화를 사랑한 것보다 공포영화가 나를 더 사랑했다."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때때로 장르를 떠나기를 원하던 공포영화 전문가였으나, 사실은 촬영감독으로 훨씬 유명한데(원래 카메라로 영화를 시작하기도 했다) [영광의 깃발]과 [아들과 연인]이라는 작품으로 두 차례 오스카 수상 경력이 있을 정도. 오스카를 수상한 작품들은 둘 모두 못 보았으나, [이노센트](The Innocents, 1961)만 봐도 실력이 어떤지는 알만하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개봉 당시 참패를 거두었고, 비디오 역시 극소량이 출시되었으며, 필름 보관도 소홀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열린 2004년의 프레디 프랜시스 영화제 당시 비디오 카피본마저도 구하지 못해 결국 상영하지 못했을 정도란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이 영화는, 어느날 돌연 인터넷에 카피본이 등장함으로써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났다고 하니. 인터넷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기는 한 것 같다.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성처럼 넓은 집에 기거하며 살아가는 한 무리가 있는데, 이 가족은 구성원이 넷이다. 한 명은 엄마의 역할(mumsy)을, 한 명은 가정부의 역할(nanny)을, 다른 한 명은 아들의 역할(sonny)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딸의 역할(girly)을 하고 있다. 그들은 좀 더 완벽한 가족을 위해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들과 딸이 나가서 친구를 물어오면, 그들은 친구에게 놀이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가 가족의 질서에 녹아들지 않으면(놀이를 거부하면), 결국 제거한다. 그런데 이 집에 멋진 남자 친구가 오게 되고, 그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가족들에 맞서는데.... 대충 이런 얘기다.

사실 이 영화는 60년대 자유연애의 풍토로 인해 무너지는 핵가족에 대한 풍자영화로 알려져 있다. 보면서는 딱히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말에 타당성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영화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꽤 재미있고 결정적인 설정이다. 이는 대가족을 지탱했었던 가부장적인 질서(물론 핵가족에게는 그런 질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구되는 정도는 조금 낮지 않을까)를 제거하려는 의도의 발현인데, 역설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가정이 외부의 위협에 대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보수적 근심도 (암묵적으로) 묻어나게 만들고 있다. 

영화의 의미야 어쨌든 장난스럽고 발랄한 터치는 꽤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특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바네사 하워드의 오버연기는 영화의 일등공신. 그녀는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dvd 커버를 보면 성적 에너지를 물씬 발산할 정도의 아가씨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잊고 소녀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어떤 면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기괴하고 안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다. 딱히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도구들은 그리 나타나지 않지만, 손님의 방에 초상화가 있는데 초상화의 눈을 통해서 옆방에서 손님을 감시한다던지, 죽은 여인을 옆에 두고 놀이를 강요한다던지, 놀이를 거부하는 친구를 방에서 끌어내기 위해 도끼로 문을 찍어댄다든지(이 장면은 [샤이닝]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하는 장면들처럼 재미있는 장면들은 적지 않다. 누구나 좋아할 작품은 아니라도 컬트영화가 될 소지 정도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Mumsy, Nanny, Sonny and Girly. Freddie Francis, U.K. 1970.
a.k.a. Girly (U.S. DVD title) 


미국에서 출시된 dvd에는 당연히 한글자막이 없다. 그리고 영어자막조차도 없다. 제목처럼 말장난이 꽤 많은 영화인 것 같지만, 해석이 안되니 그냥 그림만 본 느낌. 아쉽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