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일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현실을 잊기 위해, 계속해서 도망쳐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둔 아이를 지울 수 있는 아버지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멀리 간들 아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저 먼 곳, 남극까지 유령이 쫓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가 목표로 하는 곳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찾아 떠난 곳은 도달불가능점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꽤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임필성의 영화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때, 더욱 재미있는 구석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번 적어본다. 먼저 이하의 내용은 순전한 개인의 억측임을 밝혀둔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음을 역시 밝혀둔다.
정치적 맥락에서 다시 요약하면, [남극일기]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원들을 모두 죽음에 빠뜨리는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성장이라는 지상목표를 추구하느라, 정작 국민들의 삶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 결과 때로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독재자로 해석하면 딱 떨어진다. 그러니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르던 대장에게 반발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재자에 대항해 일어난 민주화 세대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말미의 한 대사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겼다. "너는 나를 말렸었야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이 대사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독재자의 떳떳치 못한 말로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화 세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우고 있는 듯한 의심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 느낌의 실체가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바는 또 무엇이었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영화가 차기작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하다. [헨젤과 그레텔]의 아버지(고아원의 원장) 역시, [남극일기]의 아버지(탐험대의 대장)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후에 대장과 싸움을 벌였던 유지태처럼, 원장에게 학대당하던 고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역시 그를 죽인 고아들은 민주화 세대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고아들의 실제 출생년도가 60년대라는 점이었다. 간단히 그들은 386세대로 한정지을 수 있는 연령대이다. (비록 오빠는 58년생이었지만 그가 대학생이었다면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것이니, 넓게는 그러한 세대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아들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이상향의 모습을 알아냈다.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어야 해." (당연하게도 영화 속에서 그 책은 제목처럼 [헨젤과 그레텔]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주화를 이끌어낸 책은 무엇이었을까.) 고아들은 그 깨달음대로 원장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를 만들었다. 즉, 그들은 민주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부모를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입맛에 맞는 부모를 원하지만,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모를 교체하거나, 혹은 공포를 통해 좋은 부모로 만들고자 한다. 부모를 맞는 순간부터, 부모를 유지하는 그 순간들 모두에 폭력이 깊숙이 개입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들이 만든 세계란 현실과는 달랐다. 그들은 머무른 세계는 그저 동화 속일 뿐이었다. 동화 속 세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한 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서 그저 승리에 탐닉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부모를 닮아가고 있었다. 공포와 폭력. 은수(천정명 분)는 호소한다. "그러면 니들이 뭐가 달라."
고아들은 자신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만 착한 의도가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경우가 그리 드물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좋은거야."라며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소년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맞는 얘기라도 그것이 도그마가 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해질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헨젤과 그레텔]은 그들이 동화가 아닌 현실로, 다시 한 번 나오기를 촉구하는 영화다. 고아들보다 실제로 아래 세대인 은수는 진심을 통해 그들과 소통한다. 그 결과 고아들은 현실의 은수를 몰래 방문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아직 현실로 나와 좋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세상이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희망적인 엔딩이라 할 수 있겠다. 변화에 대한 기대만 존재해도,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 임필성, 한국, 2007.
덧 1. [헨젤과 그레텔]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심은경이 연기한 영희였다. 사실 고아들이 꽤 나이가 많을 것이라는 점은 영화를 처음 볼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는데, 영희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잘 아는 듯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은경은 그저 순수하고 나약한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하지만 성적인 기운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하자니 불경한 기분도 든다만) 그래서 부모에게 성적 학대가 있었을거라는 생각도 품었었다. 실제로도 그런 캐릭터라 상당히 뿌듯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앞으로 어떻게 커갈지 잘 모르겠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배우다.
덧 2. 임필성 감독은 명확한 얘기를 너무 얌전하고 친절하게 한다는 느낌이 든다. 분노에 떠는 소년이 어머니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그림을 그렸을 때, 당연히 [캐리]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는 전개라니, 그렇게 점잖은건 곤란하다. 게다가 눈치를 이미 다 챌 정도로 힌트를 흘려놓고, 몇 번씩 설명하는 것 같아보였다. 아마 그는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듯 하다. 솔직히 나는 그가 단호하게 말하고, 주저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분명 [남극일기]도 [헨젤과 그레텔]도 좋은 영화지만, 그는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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