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eating Ree Dolly - 윈터스본 다른영화

소녀 리(제니퍼 로렌스 분)는 마을을 영위하는 마약을 거부하고, 군대에 자원하여 마을을 떠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는 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버린 아버지를 찾아내야 하는 아이러니에 놓이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는 마을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과 추악한 비밀을 공유하게 되며,
 그 결과 가부장의 지위를 승계받고야 만다(그것을 인정받는다). 즉,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을과 마을의 질서에 더욱 깊숙이 개입되게 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래서 보기 전에는 [이끼]를 떠올리고 봤던 이 영화는, 나오면서 [길버트 그레이프]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결국 [윈터스 본]에 내 멋대로 부제를 붙이자면 '무엇이 리를 좀먹어가는가(What's eating Ree)!' 정도가 좋을 듯 싶었거든. (아시다시피 이것은 [길버트 그레이프]의 원제에서 따온 것이다) 좀먹는다, 혹은 발목을 잡는다, 는 것이 다른 말로는 성장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던 길버트 그레이프의 마지막 대사. 이 영화를 보고나니, 그가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죽어 집을 태워버렸기 때문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혹은 짐스러운) 어머니와 집이 있는 한, 그녀는 당분간 마을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 마을의 일부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게 이 영화가 넌지시 던지고 있는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얘기라고 생각한다. 



Winter's Bone, Debra Granik, U.S.A. 2010.

또 다시 금연 그외

# 12월 : 한 해가 끝나갈 무렵, 담배피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일상적으로, 담배를 끊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냥 생각만 했으면 괜찮았을텐데 말로도 했음. 2011년에는 담배를 끊어볼까해. 아내는 믿지 않는 눈초리지만, 그래도 끊으면 좋지라고 말함.

# 1월 : 새해가 되고, 서너시간 참아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담배를 계속 피웠음. 아내가 새해에는 끊는다더니라고 한 마디 던짐. 진정한 새해는 설(구정)부터라고 대답했음. 물론 그냥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말임을, 나도 알고 아내도 알고 있었음. 

# 2월 1일 : 구정부터 끊는다던 농담반, 진담반 섞인 이야기를 실행해보기로 함. 하지만 장기적인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일단 연휴 동안은 담배를 사지 말아보자는 3일짜리 계획으로 시작.

# 2월 2일 : 전날 잠들기 전까지 다 태우지 못한 아까운 담배를 마저 피웠음. 금연한답시고 담배를 꺾거나 버리는 등의 개폼은 잡지 않았음. 왜냐하면 그런건 젊은 때나 하는 짓이기 때문. 어쨌거나 담배가 떨어진 시간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금연 시작.  

# 2월 3일 : 얼마나 되었다고 담배 생각에 수시로 침이 흥건히 고임. 그냥 고이고 말았으면 괜찮을텐데, 그 침을 무려 두 번이나 흘리고 말았음. 그냥 흘리기만 했다면 그래도 나았을텐데 설이라 목격자가 많았음. 게다가 하필이면 그 목격자들이 처가 식구들이었음. 착하고 예쁘다는 평가를 받는 작은 사위, 열라 추접해졌음. 나를 이토록 추잡하게 만드는 담배와 안녕을 고하겠다고, 처음으로 비장하게 각오함. 

# 설연휴 : 사탕의 힘으로 담배를 참으며 TV를 보았으나, 정말 볼 것 없었음. 노래 대결, 댄스 대결까지는 그렇다치겠는데, 수영에 육상에... 정도를 한참 넘은 것 같음. 

# 2월 7일 : 금연 100시간 돌파. 사탕 의존도 다소 떨어짐. 금연 성공에 대한 자신감 다소 상승.

# 그러나 지금 : 담배를 태우고 싶다는 참을 수 없이 강렬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함. 사실 나는 원래 1주일 정도는 잘 참아넘기는 편이었음. 그러므로,,, 전쟁은 지금부터임. 나는 이 전장에서 결연하게 배수의 진(금연사실을 공표함)을 침으로써, 최종적인 승리를 목표하기로 했음.  

# To be continued..... 

전말을 알고 있는 건 살아있는 사람뿐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공포영화

주저할 것 없이 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이 상당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복수가 통쾌하다는 평들에는 일부 밖에 공감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은 된장을 뿌리는 장면이었지만) 사실 이 영화의 복수는 주가 아닐 뿐더러, 복수와 그에 뒤따르는 결말은 상당히 불쾌한 구석마저도 가지고 있다. 아래는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몇 자 적어본 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김복남이 죽지 않았으면 별을 한 개 더 줬을 것(정확한지 모르겠는데)이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도 그렇다. 단지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철저한 복수극을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러닝타임 내내 복수라는 쾌감을 느끼게 하던 영화는, 복남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 쾌감으로부터 관객을 괴리시킨다. 하지만 그 갑작스러움은 애당초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섬을 떠나는 순간 그녀에게 예정된 것은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섬에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하자. 복수극의 관점에서라면 [김복남]은 상당히 좌절스러운 영화다. 그녀의 복수가 (완전하지는 못했다고 하나) 완결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섬이 극히 제한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거대 도시라면? 얘기가 다르다. 도시에서는 사건에 책임이 있는 방관자들을 가려낼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수도 없이 많을 방관자들에게 일일이 심판의 낫을 들이밀 수도 없다. 그러니 방관자를 포함하는 그녀의 가차없는 복수란 섬을 떠나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김복남이 살아갔던 섬이 분명히 우리 사회를 축소해놓은 것임은 명확하다. 따라서 섬에서 나간다한들,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그녀는 당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반사회장애자가 될 것(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것)이다. 섬 밖에서 최초로 만난 것이 친절 혹은 선의라고 할지라도, 복남이 처음 행하고자 한 것은 복수의 완결 아니었던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죄없는 파출소 하나 박살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아보였다) 또한 만약 이 영화가 방관자들의 책임을 지적한다는 것에 공감한다면, 그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다. 그들에게 어떠한 강제를 가하기보다는(그런 수단이 있겠는가?) 방관자 스스로의 변화를 촉구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섬으로부터 나가는 순간, 이 영화의 주는 복수로부터 벗어난다. 결과적으로 복수의 주체로서의 복남이 아니라, 단지 친구의 각성을 위한 소재로서의 복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은 역시 복남이 아니라,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본 복남의 친구가 된다. 이건 당연하다. 전말을 알고 있고,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뿐이므로. 

어쨌거나 복남의 친구는 이 사건을 통해 아주 작은, 그러나 유일한 희망을 기대하게 한다. 무책임한 방관자로부터(그 이유가 무엇이었든간에)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 역시 복남이 아니라, 복남의 친구와 처지가 같다.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아주 조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란, 특히 고통스러운 영화란, 대개 이런 법이다. 

더 나아가 나는 김복남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상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즉, 이 살인사건 전체가 단지 친구의 상상 - 혹은 내면의 투쟁 - 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이 편이 양심의 가책이 적다) 영화의 결말부, 집에 돌아와 누운 친구의 모습은 섬의 전경으로 오버랩되는데, 그 장면은 나의 해석(섬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실은 친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즉,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에게 가해질 신체적 위협과 양심 사이에서 격투를 벌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니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뭍(친구의 세계)으로 나올 수 없다. 가상의 존재인 김복남이, 가상의 공간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소멸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장철수, 한국, 2010.
a.k.a. Bedevilled


. 이 영화의 핏빛 복수가 태양과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듯, 나는 이 영화의 끝도 태양과의 대화로 끝났으면 했다. 섬에서 탈출하려는 친구까지 모조리 죽여버리고(방관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게 영화의 의도라면 친구도 죄인이다. 그러니 그녀도 죽어야 한다), 그 선착장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끝났으면 했다는 것이다. 하늘이 과연 복수를 단행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냥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터미네이터 공포영화

나는 정말 생뚱맞은 영화들 - 이를테면 [러브레터]나 [4월이야기] - 도 공포영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를 공포영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도 납득할만한 일일게다. 한 마디로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 SF적인 설정을 통해, 그 무적의 살육능력을 합리적으로 부여받은게 터미네이터라는 뜻이다. 좀 더 상세히 [터미네이터]는 공포영화의 하부장르로서 스토커무비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의 제거목표는 사라 코너이기 때문에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죽였다고 안심해서는 안 될 괴물(죽어도 죽지 않으며, 다리가 없어도 기어서 쫓아온다)은 주인공이 죽는 순간(혹은 직전)까지, 지리한(물론 영화적으로 화끈하고 즐겁다) 추격을 계속 한다. 사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건 관객과 카일 리스 뿐일게다. 사라 코너가 가장 원하는 것일 터미네이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그는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처럼 화면의 가장자리나 구조물 뒤에 숨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벽을 뚫고 나온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장면들도 상당히 섬찟하다. 처음 알몸의 터미네이터는 깡패들에게 옷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그리 쉽게 줄리는 없다. 그러자 터미네이터는 그 중 한 놈의 복부에 주먹을 날린다. 하지만 쇳덩이로 힘껏 인간의 배를 때린다고 생각해보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처럼, 물론 몇 분의 일초의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인간의 복부의 두께에 비해서는 주먹이 한참이나 더 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런. 아마도 그 깡패는 복부에 구멍이 나지 않았을까? 게다가 소름돋는 장면은 그 뿐만이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정보를 캐내는 모습. 이 장면은 정말 섬찟하기 짝이 없다. 이 장면은 [터미네이터2]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양엄마로 변장해 전화를 하는 개량형 터미네이터, 수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그의 손은 칼날로 변해 우유곽을 들고 있는 남편의 안면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자신의 신체를 수리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피부를 절개하고, 급기야 자신의 눈알까지 꺼내는 터미네이터까지. 사실 이 장면은 그가 영화적으로 기계라는 설정 때문에, 무덤하게 받아들여지는 장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쨌거나.

규모가 큰 액션영화들을 자주 접하지 않았던 시절, [터미네이터2]는 원작을 뛰어넘은 속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0년을 훌쩍 지나(1998년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더라) 다시 보니 그래도 내 취향에는 1편이 훨씬 낫다. 꼭 이 영화 뿐만은 아니지만 이 시절 영화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영화이기 때문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칙칙한 골목길의 어슴프레 피어나는 연기, 선명하지 못한 푸른 것 같기도 하고 붉은 것 같기도 한 느낌의 화면들, 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내가 좋아하던 영화들은 이런거였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는 만들어진 후 태어난 세대(비록 1편에서 말하던 심판의 날이 이미 훌쩍 지나가기는 했지만)가 감상하더라도 충분히 괜찮은 작품이라는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전설은 전설인 것이다.


The Terminator, James Cameron, U.S.A, 1984.


덧 1. [터미네이터2]는 워낙 많은 장면들이 기억나는 작품이다. 알몸으로 과거로 워프되는 씬도 그렇고, 엄지손가락씬도 그렇고, 액체금속 헤쳐모여씬도 그렇고, 트럭질주씬도 그렇고. 하지만 내게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은, 정신병원에서 탈출하려던 사라코너가 아놀드 주지사와 마주친 장면이다. 정말 저보다 더 무서워하는 연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뒤로 주저앉아 허우적대던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내가 이 시리즈(나는 4편을 보지 않았다)를 공포영화로 분류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당시 SF 영화들은 꽤 잔인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얼마전 [로보캅]을 다시 보다가는 머피 살해장면에서, 총탄에 맞아 떨어져나가는 신체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버렸다. 정말 이랬었나? 기억을 못했던거야, 아니면 없어서 못 봤던거야?

덧 2. [터미네이터]에서는 유난히 자동차나 오토바이, 특히 트럭을 이용한 추격전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 수소전지를 2개나 사용하는 녀석과 그보다 개량된 녀석들이, 복잡한 도로에서는 뛰는게 훨씬 빠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그러면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스릴 있는 추격전이 없어지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냥 조용히 접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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