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조 공포영화

전에도 말했듯 나는 개가 나오는 공포영화에 그리 겁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개가 나온 공포영화치고 또렷하게 기억하는 작품이 없더라. 하지만 나이가 조금 들고나서 감상한 [마견]은, 내 기억보다는 훨씬 괜찮은 영화였다. 그래서 [쿠조]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만간 다시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벌써 4년전 일이다. 원래 생각났을 때 바로 볼 수 없는 류의 영화란 언제 보게 될지 기약이 없는 법이다보니 오래도 지났다.

어쨌거나 다시 보기를 잘했다. 결론은 [쿠조] 역시 내 기억보다는 괜찮은 영화였다. 특히 마음에 든 부분은 플로리다의 찌는 더위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놓은 것만 같았던 [보디히트]의 느낌을, 이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적막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되, 주인공들을 차 안에 묶어둠으로써 완벽히 고립되고 갑갑한 공간을 만들어놓았다는 점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적당한 정도의 긴장감도 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쿠조]는 철저히 장르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장르적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에게 [쿠조]는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장르에 충실한 연출은 좋게 말하면 깔끔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조금 허전하다. 기본을 하는 작품이다보니, 좀 더 욕심이 좀 더 생긴걸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쿠조]는 분명히 어딘가 만들다가 만 느낌이 든다. (박쥐에 물리고 광견병이 도지기는 했지만) 쿠조는 어딘가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기준을 가지고 단죄를 내리고 있는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응징자로서의 캐릭터 설명을 소홀히 하고 단순히 미친개로 치부하다 보니 훨씬 깊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그저 지나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광견에 의해 구체적 위협에 놓이는 이들은 모두 5명(그 중 3명은 죽는다)으로, 주인공 가정의 아들과 경찰관을 제외하면 피해자들은 어떤 방식이든 호감을 주지 않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부분도 상세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 중 중요한 인물들은 자동차 정비소의 사장(쿠조의 주인)과 주인공 가족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먼저 정비소의 사장은 가족 내에서, 다른 구성원에 대해 꽤나 폭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그의 아내는 친정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을 허락받기도 어려워보인다. 또한 다른 캐릭터, 주인공 가족의 어머니는 불륜으로 인해 가정의 안정을 위협한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쿠조의 위협에 노출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이들, 즉 정비소 사장의 아내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원했던 여행을 떠남으로써(심지어 미친 개 쿠조는 정비소 가족의 아들을 보고 짖어대다가 그냥 뒤돌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또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어 상심에 빠진 소년의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여행을 떠남으로써 쿠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러니 쿠조의 습격이란, 기존 질서를 해하는 이들에 대한 응징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이것을 지나친 의심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어째서 감독 루이스 티그는 가족들을 그렇게 그려냈는가. 만약 감독이 역할이 원전을 그대로 옮긴 것 뿐이라면, 스티븐 킹은 어째서 그런 설정들을 만들어두었을까. 책을 읽어보지 못한지라 잘 모르겠다만, 책에는 훨씬 구체적이고도, 풍부한 이야기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만간 읽어볼 계획이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주인공 가족에 국한해서 영화를 정리해보면, 알 수 없는 소년의 두려움(소년은 벽장 속 괴물을 두려워하는데, 이 괴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불륜이 밝혀지며 발생하는 가정의 불화(바로 이것이 모호한 불안의 정체인지도 모른다)가 발생한 후 곧이어 쿠조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쿠조와의 대치 속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한 어머니의 모성이 그려지고, 결국은 아내와 아들을 구하러 온 남편까지 가세하여(비록 남편이 도착했을 때 모든 상황은 종지부된 상태지만) 서로를 부둥켜 안은 가족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즉, 아내의 불륜이 어머니의 모성에 의해 묻혀지는 상황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중요한 순간에 곁에 없었던 남편의 부재를 지적하는 상황이라고 봐야할까.

Cujo, Lewis Teague, U.S. 1983.



영화를 보는 태도 - 셔터아일랜드 다른영화

영화를 처음 보고나서 단번에 든 생각은 마틴 스콜세지가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찍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린치의 트레이드 마크, 지독한 악몽같다는 생각이 이 영화의 전반적 인상이었거든. (물론 스콜세지의 악몽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넓은 영역 - 즉, 미국 - 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겠지만) 모름지기 악몽이라 함은 개연성이 없어야 제 맛인 것처럼, 영화 역시 다소간 모호한 태도로 이미지의 힘을 강하게 내세우며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모호하다고 해서 개연성이 없는건 아니다. [셔터 아일랜드]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 그런지, 매우 탄탄한 서사를 자랑한다. 어딘가 이상한 이미지의 삽입과 나열들은 결말부에서 친절하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이 납득이 되었을까? 난 잘 모르겠다. 저토록 정교한 역할극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한 사람의 기억과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거든. (테디의 재발이 처음이 아니므로, 테디의 환상 모두를 의사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적당히 수정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이란 남들이 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줄 알게 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그 시간에 한해서라면 어긋남이 없는 깔끔한 서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반전영화라고 칭송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반전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구석이 있다. 반전이라는게 관객의 뒤통수를 탁 치는 그런 것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 작품의 결말은 전혀 그런 구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섬세하게 구축된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무슨 뜻이냐고? 이 영화의 결말은 당연히 올 것이 온 것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영화 문법이라는 것에 익숙치 않은 관객이라 할지라도, 영화 - 특히 테디의 회상과 관련한 부분들 - 의 어딘가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정도를 느끼지 못할리는 없다. 이상한건 덜컹거리는 편집 뿐만이 아니다. 그의 기억 속의 공간, 사건, 심지어 들려오는 음악 마저도 관객은 섬의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조금씩 왜곡되어 있을 뿐. 대체 왜? 보통 이런 질문에 대한 가장 쉽고도 합리적인 답안은 테디의 기억이 뭔가 이상하다고 결론 짓는 것이다. 막말로 그토록 온전한 데자뷰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셔터 아일랜드]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들은, 비슷한 부류의 다른 영화들처럼 함정을 깔아놓거나, 혹은 공정한 게임을 구축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답을 노골적으로 알려주려는 노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을 반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셔터아일랜드]는 영화를 보는 태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객들이란 주어진 시간 내에 영화가 제공하는 폭력적일 정도로 방대한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그러니 영화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르면 관객들은 그전까지 있었던, 혹은 있었어야 마땅할 의문들을, 반전이라는 명칭 하에 간단히 봉합시켜버린다.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로, 이야기가 그렇다니까라면서.

이건 흡사 스콜세지의 체념 섞인 넋두리처럼 보인다. 대체 영화를 통해, 피상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그 관객들의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은 본 것도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괴상한 느낌을 그냥 수용한다고 해서, 그들이 영화의 진심도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가 그들의 어딘가를 거슬리게 하는 무언가를 들추어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관객이 스스로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태반의 관객들은 우리 안의 괴물을 인정하고 그것과 싸우며 살아가기보다는, 단순히 그것을 무시하고 착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한다. 결말의 테디처럼, 자신이 본 것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기를 원한다. 일견 그것이 인간다워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진실을 외쳐본들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만일 뿐인데.


Shutter Island, Martin Scorsese, U.S.A., 2010.


덧 1. 물론 모든 관객에 대한 얘기는 아니니 발끈하지 마시기를.

덧 2. 사실 이 포스팅은 내가 작성한 글이라기보다는, 이 글의 복사본 혹은 내멋대로 다이제스트에 가까움을 말해둬야겠다. 완전히 공감하는 글이다. 내가 [셔터아일랜드]의 흡입력에 기인하여, 영화에 대한 일말의 불만도 없다는걸 제외하면.

덧 3.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에서 나의 것이 아닌 돈 10만원이 발견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보통 이런 문제의 답이란 내가 방에 두고 까먹은거던가, 아니면 내가 시치미를 떼고 있는거다. 반전은 대개 이런거다.

피의 발렌타인 공포영화

발렌타인 축제 때문에 구조가 늦어져 탄광 속에 며칠이나 갇혀 있었던 한 남자가 살아 돌아온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 그 끔찍한 어둠 속에서의 경험 때문에 이 남자는 살포시 돌아버리는데, 축제가 열릴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지 이 마을에서는 축제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버린다. 그가 정신병원으로 실려간 몇 년 뒤. 발렌타인 축제를 준비하는 이 마을에 누군가로부터 축제를 열지 말라는 피의 경고가 다시 들이닥치는데.... (중략) 알고보니 이전의 정신병자는 이미 죽었고, 사실은 이 남자가 어쩌고 저쩌고...
[피의 발렌타인]은 대충 이런 부류의 꽤 낡은 영화다. 슬래셔 영화가 인기를 끌던 초창기 작품이니 낡았을 법도 하다. 

이제 와서 내가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된 이유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간 [피의 발렌타인]은 검열 때문에 팥 없는 앙꼬빵이 되어버린 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는지가 상당히 궁금했었는데(얼마전 3D 개봉 덕분에 더더욱), 이제야 비로소 확인을 했다는 얘기다. 소문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라지만, 확인해보니 실제로 잘린 장면이 꽤 많다. 삭제장면이 이어져 있는 감독판으로 감상했는데, 삭제장면들은 그렇지 않은 장면들과 비교할 때 현저한 화질 저하가 일어나고 있어 따로 삭제장면을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다. 또한 극장판에 비해서는 확실히 센 장면들이 있다. (물론 이 정도는 충분히 익숙하고도 남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아마도 잔인한 장면 하나 하나에 환호하던 시절에 감상했더라면,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을 장면도 하나 쯤은 있었을거라 생각한다(잔인해서가 아니라 기발해서). 다 보고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걸 다 떼놓고 개봉하려면 찍은 사람 가슴도 찢어지겠구나!

[피의 발렌타인]은 네 놈이 희희낙낙 즐기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상기시켜주는 작품이다. 하필 발렌타인데이와 이 이야기가 연결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 역시 비슷한 구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나를 선택한 순간, 선택받지 못한 다른 어떤 놈은 어두운 방구석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거니까. 물론 너무나 극단적이고 유치한 전개에 그러한 메시지가 와닿기 전에 휘발되어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My Bloody Valentine, George Mihalka, U.S.A., 1981.


[슬래셔영화의 흥망과 성쇠]라는 공포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언급된 적이 있지만, [피의 발렌타인]이 있은 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념일들은 공포영화 특히 당시 붐을 일으켰던 슬래셔 영화의 소재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발렌타인데이가 슬래셔 영화들의 러쉬 속에서의 첫 희생양이 되었던 것일까. 앞서 나는 이 이야기와 사랑의 속성이 비슷해서라고 말했지만, 실은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생각이 뻗어가지 않았을까. 13일의 금요일 다음날은 14일의 토요일이네. 14일에 뭐 없나. 어라, 발렌타인데이가 있네. 그럼 이걸로 가볼까 정도의 단순한 생각.
실은 [피의 발렌타인]의 발렌타인데이가 바로 14일의 토요일이다. 그 하루 전날을 13일의 금요일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자막을 띄우기도 한다. 


지겹구나, 리메이크 Arborday

따지고 보면 공포영화의 역사 속에서 리메이크 작품들이 활개를 친 것은 비단 요즈음만의 일은 아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속의 캐릭터들인 몬스터들(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미라, 늑대인간 등)은 30년을 주기로 그 모습을 스크린에 드러냈다. 1930년대 아내부터 시작해서 아들, 딸까지 우려먹으며 미국 공포영화계를 주름잡았던 각종 몬스터들은 1960년대 말 이후 영국에서 천연색을 입고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고, 비록 60~7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90년대에는 명감독, 명배우, 거대예산의 조합으로 좀 더 드라마에 치중하는 식으로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그 뿐이랴, 15년에서 20년을 주기를 두고 조금씩 그 모습을 바꿔가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작품(돈 시겔 1956, 필립 카우프만 1978, 아벨 페라라 1993, 올리버 히르비겔 2007)도 있는데, 이 영화는 옆 집 코흘리개 아이가 대학생이 될 무렵에는 다시 리메이크 될 것이라고 장담해도 좋다.

하지만 늘 존재해 왔다고 해서 현재의 리메이크 열풍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지금처럼 쏟아졌던 시기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은 숱한 아이콘들을 가리지 않고 되살린 마이클 베이였다. 어느 날 마이클 베이가 [텍사스 살인마]를 리메이크하겠다고 말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의 발언을 지나가는 농담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일부는 농담으로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텍사스 살인마]와 같은 걸작을 훼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거니와, 또한 누군가 그런 짓을 하게 된다고 해도 대규모 팝콘무비로 명성을 얻은 철학 부재의 사나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의 예상은 대개 사실로 이어졌다. 마이클 베이가 되살린 공포영화들은 가벼웠다. 원작에 대한 어떤 의미 있는 재해석도 없었고, 또한 원작을 채우고 있었던 시대정신도 사라져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마이클 베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짚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의 부재만큼 현대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을테니까.)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쳤는데, 그것은 베이가 제작한 리메이크작은 모두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베이는 잭팟을 터뜨렸고,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론가와 일부 관객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그를 조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작품들이 러쉬를 이루고 있는 것일까?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최근 헐리웃이 소재 고갈에 시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 고갈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새로운 소재를 개발함으로써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쉽나. 그러다보니 헐리웃이 선택한 것은 자국과 외국의 검증된 콘텐츠로 눈을 돌리는 리메이크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게 먹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리메이크작이 높은 수준의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당초 베이의 성공은 작품성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수익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추세를 만들어낸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보다 정확한 이유는 그게 돈이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시시한 답변임을 알고 있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답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왜 그게 돈이 될까? 당연히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리메이크작의 관객 층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원작을 아는 관객층이며, 다른 하나는 원작을 모르는 세대의 관객층이다. 먼저 원작을 아는 관객층에는 대충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대개의 장르팬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공포영화의 팬들은 비교적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허접한 영화들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종류의 영화라면 퀄리티를 불문에 붙이고 일단 감상부터 하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이트메어]나 [13일의 금요일], [할로윈] 등의 저질 속편(모든 속편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들이 그토록 활개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니 아마도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리메이크가 원작을 훼손한다고 비아냥거리면서도, 극장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든 극장에 가게 되고야 말 우량고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전설적인 원작들을 스크린에서 접할 기회가 없었던 또 다른 세대들이 있다. 다소 낯설었던 전설들은 좀 더 입맛에 맞는 배우와 연출을 통해, 친숙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객들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요즘 주로 리메이크되고 있는 슬래셔영화들은 2000년을 대표할 수 있는 [쏘우]나 [호스텔] 등의 고문영화와도 영화 성격이나 내용에 있어 맥이 닿는 구석이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 뿐이랴? 최근의 몇몇 작품들의 경우, 어지간한 안티히어로에 맞먹는 캐릭터성까지 겸비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리메이크, 특히 70~80년대 작품들의 리메이크는 신구관객에게 모두 어필할 수 있는 검증된 컨텐츠로서 기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 영화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대체 리메이크작의 수익성은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대부분의 리메이크작들은 첫 주말 수입만으로도 예산을 회수한다. 이런 안전한 투자는 다른 어떤 산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과연 리메이크 대세론이 계속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시시하다. 돈이 되니 만들어졌던 것처럼, 돈이 되지 않게 되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돈만 된다면 다시 가져 올 영화들은 무수히 많을 정도로 헐리웃 공포영화의 토양은 풍부하다. 그러나 그 어떤 추세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공포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슬래셔 영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영화의 쇠퇴기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결코 식지 않을 것만 같아 보이던 제이호러의 인기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원작의 명성에 기댄 그저 그런 작품들의 러쉬 역시 익숙해지자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던 선배들의 운명을 답습하고 말 것이다. 관객의 취향이 변한 탓이든 아니면 관객의 인내심이 고갈된 탓이든 간에. 때로 관객은 제작사의 상술에 놀아나는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간을 조금 넓게 잡고 보자면 관객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내린다. 리부팅이라는 야심을 가지고 시리즈 제작을 염두에 두고 리메이크했던 작품들의 후속편들에서, 눈에 띄는 수익성 저하가 나타나는 점은 이미 그러한 조짐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니 현재의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 이라면 이 광풍이 지나가기를 잠시 기다리면 될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즐거운 이라면 충분히 즐기면 될 것이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리메이크나 리부트의 추세가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를 않는다. 정말 [나이트메어] 무지하게 재미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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